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 (문단 편집) == 종합 == '''서해갑문 건설에 약 70억 달러,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로 약 60억 달러, 그리고 비날론 공장 증설로 약 100억 달러, 총합 230억 달러를 허무하게 낭비한'''[* 참고로 1990년의 북한 GDP는 147억 달러에 불과했고, 2021년 기준으로도 북한의 GDP는 168억 달러도 되지 않는다.(...)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IZGI01_301&conn_path=I2|#]](상단의 시계 아이콘을 누름으로서 통계 시점을 변경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북한은 '''자기 1.5년 GDP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장 [[콩고민주공화국]]도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가 겨우(???) 1년 GDP와 맞먹는 돈을 해외로 빼돌려서 극빈국으로 전락한 것인데 1년 GDP보다도 많은 돈을 낭비한 북한의 경제가 멀쩡히 유지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증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전술한 세 시설들 외에도 류경호텔과 국방비, 지도자 일가 우상화 등에 들어간 돈까지 합치면...] 북한 경제는 이 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북한이 낭비해버린 수십억 달러의 국방비 투자+우상화 시설 건립까지 합하면 북한 경제가 입은 손실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2023년 현재까지도 북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겨우 버텨나가고 있는 게 더 신기할 정도.~~그저 독하다 독해~~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삽질은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였는데, 다른 사업은 유동성 자산이나 현물 자산을 활용할 수 있었으나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 비용은 당연히 외국인들을 초청해 이것저것 가판대에 행사 같은 걸 벌여야 했던만큼 얄짤없이 외화 현금[* 당시 북한 외교관이었던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대금 지급용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온 외교관이 동원됐다고 한다. 북한 내 금융 기관이 보유한 현금을 모조리 꺼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련, 중국, 아프리카 등 당시 북한이 외화국고금으로 예치한 현금을 인출해 축전총국에 갖다주고 그걸 다시 항공사나 무역사에 지급하느라 외무성의 본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이었다. 즉, 60억 달러라는 막대한 현금을 날려버린 셈. 당시 북한의 1년 예산은 넉넉하게 잡아도 40억 달러인걸 감안하면 국가 1년 예산 이상을 축제하느라 날려버린 것이다. 또한 육류, 쌀, 밀, 채소 등 비축하고 있던 식량마저 외국인들 먹고 재우는데 소비하였고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배급 체제마저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90년부터 함경남북도 자강도 양강도에서 배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불어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붕괴함으로 인해 무역길이 막히며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나 중국이 정치적인 이유로 저급한 북한 제품을 구매해줬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더군다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우에는 경제 상황이 너무도 나쁜데다[* 1992년 당시 물가 상승률이 공식통계로 2000%에 달했던 상황이었고 이후로 물가 상승률은 낮아졌지만 빈곤율은 엄청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새로 민영화된 기업에서 세금 체납과 임금 체불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던지라 정부에서 연금이나 공무원 급여도 체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기업도 임금 체불을 해서 임금 대신에 물건을 대신 받아서 팔아치워야 했던 일이 다반사였으며 학교에서도 겨울철에 난방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러시아는 소련 시절에 국가 차원에서 대중들에게 [[별장]]을 지급해서 별장이 대중화되어있던 관계로 도시민들과 농민들이라도 농사를 지어서 최소한 먹고살 만큼의 농작물을 자체 수확할 수 있었기에 북한처럼 식량난을 겪지는 않았다. 물론 북한도 텃밭 농사를 장려하기는 했지만 국토면적의 차이와 농사를 짓기에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거기에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이 친한반북 성향이라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공산권에서 소련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소득이 크게 신장했으나 아직 1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형편이 없었다. 전체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인구가 훨씬 적은 일본 경제력의 반은커녕 1/8에 불과했고,[* 다만 당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GDP를 다 합쳐도 일본 한 국가에 못 미쳤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인구 600만에 불과한 홍콩이 중국 경제력의 1/5, 인구 2,000만으로 역시 성 하나 수준인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였던 시절이었으며, 한국의 경우는 90%였다. 더군다나 다른 국가에 수출하기에는 북한 제품의 품질이 심각하게 낮았고 이미 북한보다도 값싸게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넘쳐나다보니 경쟁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1993년에는 그토록 추진해 왔던 제3차 7개년 계획도 실패했고, 여기에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가 겹쳐지면서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초하게 되는 동시에 북한 외부에서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심각한 건 북한에서는 반성은커녕 아직도 이 실책들을 '혁명과업의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술한 서해갑문에 대한 자화자찬만 봐도 북한의 현실 인식이 얼마나 뒤떨어졌는지를 보인다. 심지어 [[우리민족끼리]]에서는 류경호텔을 비판하는 것은 외부의 '악선전'이라고 우긴 적도 있다.(...)] 사실 반성했다면 지금 그 꼴 날 리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수령절대주의라는 주체사상의 이념 문제가 걸린다는 것. 여기에 대한 실책을 인정할 경우 주체사상의 해석 여지에 따라 '[[백두혈통]]'이 스스로에게 [[인민재판]]을 당한 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인민의 손에 죽어야 하는]][* 참고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존경한 것으로 유명한 독재자였다.]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의 정치적 정당성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독재국가의 최대 약점인 소수의 높으신 분들이 저지른 오판과 무능이 나라 전체를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위험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분류:김일성 시대]][[분류:북한의 경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